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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정의

Posted 2006. 4. 11. 18:38

수업 과제이기때문에 굉장히 평이하고, 어쩌면 당연한 내용.

 

환경관리 세미나 <환경정의와 환경갈등> 에세이 1 

 

환경정의 개념과 한국적 적용가능성에관한 논의

 

2006년 4월 11일 Luna

0. 들어가며


수많은 환경 문제를 공부하고 접하면서 드는 의문은 “과연 세상은 진보하고 있는가?”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이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고 얘기한다. 또한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에 환경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러한가? 이 질문을 평등의 관점으로 살짝 바꾸어 보면 “과연 모든 사람에게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졌는가?”와 “환경 문제를 제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경 문제가 먹고 살만해져 되돌아보는 사치스런 문제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체 될 수 있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누구에게” 그렇지 않은가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환경과 관련 된 많은 불평등이 실재한다면, 이러한 문제와 궁극적인 환경위기의 해결은 어떻게 함께 진전할 수 있을까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위의 문제들과 더불어 현재 우리나라의 환경 문제 해결하는데, 이러한 내용들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를 살펴보려고 한다.


1. 근대화(Modernization)와 평등


화려한 근대화(혹은 문명화)의 모습 뒤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8,9세기 영국의 경우는 이러한 비극을 보여주는 배경으로 많이 쓰인다. 막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시기, 귀족들은 수많은 파티와 여러 가지 문명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쫓겨나 거리에는 빈민들이 넘쳐났으며, 비록 일터에 남아있던 노동자들이라 할지라도 극악한 노동 여건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그림 1).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인 보건의 질이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으며, 이러한 불평등 역시 거의 해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통제의 방식이 보다 세련되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문명의 혜택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 뒤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림 1]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영국 도시 빈민가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물을 공급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출처: 2006년 2월3일자 한겨레)



전에 어떤 공공기관에 아침 일찍 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훨씬 전의 이른 시간에, 청소하는 사람들이 계단을 일일이 손걸레로 닦고 있었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일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고, 손걸레를 쓰는 이유는 다른 도구들도 많이 있지만 손걸레로 일일이 닦는 것이 가장 깨끗하기 때문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은 주변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다. 청소차는 사람들의 미관을 고려하고, 활동에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자고 있을 때 돌아다니고, 환경미화원들은 어두운 골목에서 청소를 하다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얼른 밖으로 내다버린 쓰레기가 매일 집 앞에 쌓여 부패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위의 예들과는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자동화’되었다는 많은 부분들 역시 그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들어 가 있다. 우리가 고지서를 납부하러 은행에 가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진 자동화기기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가서 기계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훨씬 편리해졌지만, 그 대신 뒤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들어가 있다. 대부분의 ‘편리한 서비스’들 뒤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파편화되고 통제된 노동이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문명화의 밝은 면 뒤에는 항상 이를 지탱해주는 훨씬 어둡고 거대한 부분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사회는 더욱 계층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2. 환경정의 개념의 발전과 문제점


환경정의라는 개념은 앞서 얘기했던 근대화의 어두운 부분들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환경운동의 시초로 얘기되는 활동은 1982년 미국의 Warren County에서 흑인 거주지 인근에 폐기물 매립장을 설치하려는 주 정부의 계획에 반대하는 운동이며, 이때 민권활동가들과 환경활동가들이 함께 환경정의 운동의 틀을 구성하였다(Bryant와 Hockman, 1995). 미국에서 시작 된 운동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고 있는 인종문제, 특히 가장 큰 피해자인 흑인들로부터 발생하였으며, 발전 역시 이러한 내용이 중심이 되어왔다. Houston에서도 역시 흑인이 중심이 된 또 다른 폐기물 입지 반대운동인 Northwood Manor구역의 Whispering Pine 위생매립지 운동이 벌어진 바 있다. 여기서 폐기물 처리시설의 인종적 불평등 입지를 밝힌 Bullard는 환경정의에 대해 “모든 미국인들이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지속가능하고 올바른 환경에서 살고, 일하고, 놀고, 학교에 갈 권리와 존엄을 가진다.”는 정의1)를 내렸다(Bullard, 2005).

이러한 활동들 이후 폐기물 입지시설 뿐 아니라 루이지애나의 미시시피강을 따라 입지한 화학공장으로부터 발생한 암으로 공동체가 해체된 사례(Wright, 2005), Los Angeles 시내의 대기질 문제(Pomar, 2005) 등의 사례들을 통해 인종 간 환경 불평등의 문제들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왔다.

미국에서 환경정의 운동의 진화 과정을 Faber와 McCarthy(2002)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 1994년 대통령령 12898호 “소수민족과 저소득층에 있어서 환경정의를 위한 연방 법률”의 공포, NEJAC (국가환경정의 고문위원회)설립과 같이 공식적인 기관과 제도를 통해 환경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정의의 개념이 미국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들이 인종차별과 관련된 부분이 중심이 되어왔고, 빈부에 따른 격차도 이와 함께 다루어지기 시작하였으나, 여성, 어린이나 인간 이외의 여러 생태계 구성원 등, 다양한 범주에 대한 고려는 아직까지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회 운동들이 진보를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여성이나 어린이 등 다양한 구성원의 참여가 제한적인 것이 사실이다. 여성 참여의 경우 환경운동의 경우 타 운동에 비해 상당히 나은 상황이다(Bryant와 Hockman, 1995). 그러나 여전히 사회 내 약자로써 환경 불평등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또한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타인에 비해 유약한 신체를 가지거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선천성 과민성(atopy)이나 allergy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역시 필요하다.

또한 Leopold(2003)의 주장대로 인간뿐만 아니라 토지와 지구생태계가 함께 포함하고 있는 다양한 생태계 구성원들도 생태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효용에 의해 평가될 수 없는 고유의 가치 말이다.

 

3. 환경위기와 환경정의


그렇다면 이러한 환경정의가 현재의 환경위기를 해결하려는 전체적인 틀과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환경 정의는 기본적으로 환경적 비용 부담과 환경문제 통제 수단의 분배적 정의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 대상은 앞서 얘기하였듯이 미국의 경우 기본적으로 인종간의 분배가 중심이 되어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배적 정의만으로 환경위기를 헤쳐 나갈 수는 없지 않을까?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반박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환경정의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그동안 은폐되고 도외시되었던 문제가 바깥으로 드러나고, 불평등으로 발생했던 상대적 혜택의 수혜자들이 그동안 제외되었던 부담의 의무를 다시 짊어짐으로써, 환경위기 해결을 위한 노력을 더욱 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론 성립의 시초가 되었던 폐기물 매립의 경우, 많은 백인들은 폐기물을 자신들의 구역에서 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유해폐기물 문제를 도외시해왔으며, 공교롭게도 그들이 통제의 수단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해 폐기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그리 크지 않았었다. 그러나 통제수단이 없었던 흑인 구역에서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환경정의를 주장함으로써 백인들은 자신들의 구역에서도 유해 폐기물 문제를 더 이상 도외시 할 수 없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 환경정의의 대상이 인간(그 중에서도 인종)에 그쳤지만, 앞으로 환경정의 이론이 발전함에 따라, 앞서 언급한 Leopold(2003)의 주장대로 대상이 생태 공동체 구성원으로 확장된다면, 이는 환경위기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토양 오염의 경우, 토지 자체에, 도로 건설의 경우 건설로 인해 절․성토 공사가 이루어지는 주변 지역의 동․식물이 정의의 대상으로 포함되면서 생태계 파괴 문제 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4. 21세기 한국에서의 환경정의


권해수(2002)는 우리나라 환경정의 운동의 예로 그린벨트 보전운동과 내셔날 트러스트 운동을 예로 들고 있다.

그린벨트의 경우 보전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린벨트 정책이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지역간/계층간 불평등 문제, 그린벨트 지정지역과 비지정지역간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해제과정에서도 해제이익이 균점되지 않고 사후 토지취득자들이 혜택을 보는 등 불평등 문제가 일어났다.

이와 많은 부분 비슷하지만 시민들이 좀 더 적극적인 주체가 된 사례가 내셔날 트러스트 운동이다. 이는 기존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들-이념성의 부재, 대중참여운동으로서의 한계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운동으로써의 의미가 크다.

이외에도 최근의 경부고속전철 건설에 따른 천성산 보존운동을 보면, Loopold가 주장한 윤리범주의 확장이 시도되었다. 비록 패소하였지만 도롱뇽을 주체로 한 소송을 제기한 것은 환경운동에서 인간과 다른 생태공동체 구성원간의 권리 불평등에 대한 최초의 법적 문제 제기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환경 불평등 문제는 사회 곳곳에서,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더 가중 될 수 있다. 며칠 전 극악한 황사가 불어 닥쳤을 때만 해도 경제적 능력에 따라 집안에서 공기청정기 사용 여부, 외출 시 자가용 사용 여부에 따라 그 악영향의 효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지역간, 사회계층간 불공평의 문제가 혼재하여 상대적 박탈감 역시 더욱 심화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앞으로 환경의 질이 저하됨에 따라 더욱 심화 될 것이며, 단순히 사치스런 활동이 아닌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아주 극단적인 모습으로 까지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환경정의의 틀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아직 우리나라 내에서 환경정의는 순수한 ‘개념’으로만 머무르고 있었던 면이 강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천성산 도롱뇽 소송’등과 같이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활동 역시 같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사회의 역동성과 다양한 시민단체의 활동들을 고려할 때, 환경정의 운동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활동들이 기존의 이슈파이팅 형식으로 흘러가서는 안 될 것이며 생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부정의를 포착하고, 밝히고, 정책을 개선하려는 실질적인 노력들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5. 마치며


이 글의 머리에서 제시하였던 “세상은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나에게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다음에 던졌던 질문들 -“과연 모든 사람에게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졌는가?”와 “환경 문제를 제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경 문제가 먹고 살만해져 되돌아보는 사치스런 문제인가?” 란 질문들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며, 어떤 이들에게 이러한 문제는 생존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실재하는 환경 불평등은 사회적인 약자로 인종, 경제적 능력, 성별, 나이 등등에 따라 나타날 수 있으며, 비인간 생태공동체 구성원들 역시 약자일 수 있다.

이러한 환경부정의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는, 환경정의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그동안 은폐되고 도외시되었던 문제가 바깥으로 드러나고, 불평등으로 발생했던 상대적 혜택의 수혜자들이 그동안 제외되었던 부담의 의무를 다시 짊어짐으로써, 환경위기 해결을 위한 노력을 더욱 크게 할 수 있을 것이며, 두 번째 지금까지 환경정의의 대상이 인간에 그쳤지만, 앞으로 환경정의 이론이 발전함에 따라, 대상이 생태 공동체 구성원으로 확장된다면, 이는 환경위기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린벨트 보전운동이나 내셔날 트러스트운동, 최근의 천성산 도롱뇽 소송과 같은 운동들이 환경정의 운동의 맹아를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들과 더불어 일상생활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환경 부정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더해진다면, 환경정의 운동은 환경위기를 해쳐나가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Bryant, B. and Hockman, E. 2005. “A Brief Comparison of the Civil Rights Movements and the Environmental Justice Movement,” in D.A. Pellow and R. Brulle (eds.),  Power, Justice and the Environment. Cambridge, MA: MIT Press: 23-36.


Bullard, R. 2005. “Neighborhood “Zoned” for Garbage,” in R. Bullard (ed.), The Quest for Environmental Justice, Sierra Club Books: 43-61.

Faber, D. and McCarthy, D. 2002. “The Evolving Structure of the Environmental Justice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New Models Democratic Decision-Making,” Social Justice Research. Vol. 14, No. 4: 405-421.


Leopold, A. 2003. “The Land Ethic,” in Andrew Light and Holmes Rolston (eds.), Environmental Ethics. Malden, MA: Blackwell Publishing: 38-52.


Pomar, O. 2005. “Environmental Inequity in Metropolitan Los Angeles,” in R. Bullard (ed.), The Quest for Environmental Justice, Sierra Club Books: 108-121.

Wright, B. 2005. “Living and Dying in Louisiana's ”Cancer Alley”,” in R. Bullard (ed.), The Quest for Environmental Justice, Sierra Club Books: 87-107.

권해수. 2002. “우리나라 환경정의운동연구”, 『환경사회와 행정연구』 13(2): 151-166.

이정전. 1999. “공리주의와 롤즈의 정의론에 입각한 환경정의”, 『정의의 눈으로 환경을 본다』,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환경정의시만연대 사회정의․환경정의 심포지움 자료집: 26·34.

한겨레신문 20006년 2월 3일자 기사





1) 이는 이정전(1999)에서 총 효용으로 평가하는 공리주의보다 사회최약자의 복지를 증진시켰는가에 의해 제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롤즈의 정의론이 보다 지속가능발전의 이념에 부합한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Posted 2006. 3. 20. 14:05

누군가 그랬다.

無爲도 爲라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짓을 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멀리서, 소식만 듣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

달려 갈 용기가 없다는 것.

그들과 함께 하고싶은 마음 뿐이라는 것.

나와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지만

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나는 계속 죄를 짓고 있고, 마음의 빚은 쌓여만 간다.

 

지금 새만금은 끝막이 공사가 막바지이고,

어민들의 배가 해경들과 대치중이라고 한다.

 

이미 언론도 등을 돌려 어디에도 그런 기사는 없다.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미안하다.

 

2005년 첫날01 -그레 벽화

Posted 2005. 1. 4. 20:40

저 여인이 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그레'랍니다.

갯벌 생태계를 지나치게 교란하지 않고도 조개를 채집할 수 있는 생태적인 의미가 있는 기구라고 합니다. 듣기만 한거지만요^^;

벽화를 거의 다 그렸을 즈음에, 그레 위에서 세바퀴 원을 그리고 날아간 새.

전 매인줄 알았는데 아니라더군요.

줌의 한계로 잘 보이진 않네요.

약간 어둑해졌을 때 완성이 되어서 사진이 잘 안나와서 무지 아쉽네요.^^;

2004년 마지막날01

Posted 2005. 1. 4. 20:00

그레의 창문..

참 오랫만에 보는 나무창틀이었습니다.

그레 안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있습니다.^^;
별채에서는 뛰노느라 배고플 아이들을 위해 요리유랑님의 떡볶이가!


2004년 마지막 밤의 장작불.. 개인적으로 참 맘에 드는 사진.

다시 계화도로, 새만금으로...

Posted 2004. 12. 31. 00:30

* 이 글은 개굴님의 [갯벌배움터 그레, 벽화 그리기] 에 관련된 글입니다.


[2003년 8월 10일 바닷길 걷기를 마치고 계화도에서 찍은 사진]

 한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계화도 분들이 집회때문에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 조차 뵙지 못했다.


한 학기정도,

내 삶에서 중요한 많은 것들을 꾹 꾹 덮어두고 살았다.

잘 한건지는 모르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 밖에 없다.

 지금,

내가 준비가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2005년은 보다 마음가는데로 살고싶다.

 

그 시작은,

그들과 그곳에서 함께 하려고 한다.

 

p.s. 1월 2일날 돌아올 것 같아요-




최근 며칠간.. 아주 아주 심난한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쳐있는 나에게

내마음속의 자전거 11, 12권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생명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보자.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 전쟁과 환경에 관한 세미나를 제안합니다. 

==================================================================== 

제안하기까지의 고민 -환경문제는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강의실에 앉아 환경을 얘기하고, 생태를 공부하고, 
창밖의 꽃을 보며 봄이 왔음을 즐기는 그 순간에도, 
지구의 한 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사이 여의도에서는 
우리가 전쟁을 도울 군대를 파병해야하는가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결국 우리나라는 이라크 전쟁의 참전국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연구실이나 강의실에 앉아서도 
우리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연구를 하고, 환경을 논하는 것은 
좀 더 나은 세상을, 좀 더 나은 미래를 일구려고 한 것이지 
서로 죽이고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민을 하던 한 사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물론 전쟁은 그 잔인성 만으로도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임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이제 거기에 실제적으로 전쟁이 어떻게 생태계를 파괴 해 왔으며, 
어떻게 자연과 인간을 대상화하고 인성을 파괴 하는지, 
또한 생태 경제학적인 측면에서는 
어떻게 전쟁을 평가할 수 있는지에대해 얘기하며, 
전쟁의 부당함을 알리고, 반전의 목소리에 힘을 더하려 합니다. 

문의: 011-****-9817, luna980@hanmail.net